Critique

이미지에 연동하는 정체성 -유근오

작성자
ad***
작성일
2023-04-28 06:22
조회
238
“나는 그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 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의 서두에서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그렇다. 왜 인간은 자기 식으로, 취향대로, 기분대로, 감정대로, 체질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진정 나는 나일까? 이런 질문은 인류의 역사 이래 내내 있어왔다. 20세기 이후 ‘자아’와 ‘정체성’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소통의 영역이 넓어지면 질수록 ‘나’란 존재감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작가 박진화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그의 그림을 통해 발견하다. 오래되어 묵을 대로 묵은 존재의 정체를 짚어봐도 기어이 의식의 이면으로 기우는, 화려함에도 그늘 우묵한 그의 화면에서 필자는 ‘자아’라 일컫는 또 다른 ‘나’의 모래성을 발견한다. 그는 자아를 의식하고자 한다. 자아란 엄밀하게 말해서 의식의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정신분석학이 아닐 바에야 굳이 그것을 개제할 일은 아니다. 여기에서 의식이란 대상들의 중심이며,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특히 의식은 해석학적 현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따라서 그의 의식이 정체성과 연계를 가지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즉 ‘인간은 사물과 달리 의식 활동을 하며, 인간은 무엇을 의식하기 위한 존재이지 무엇에 의해 의식되는 존재가 아님’을 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고견을 빌리자면 인간은 존재하면서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이며,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도 세계를 대상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특수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방식은 일반 사물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리 간단치 않다. 그런 인간의 ‘자아’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모순점이 공존하는 추상적 개념이기에 명확히 분석하거나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를 고려하면 일상에서 완전무결한 자아의 인식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동양에서는 어떠한 순간에도 인간은 단 하나의 고정된 자아만을 가지는 일은 없다고 여기며, 이는 우리의 의식 저편에 언제나 또 다른 모습의 자아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박진화는 이러한 의뭉스런 특성의 자아를 파고든다. 그는 인간 이면에 잔뜩 뒤섞여있는 감정을 ‘자아’내지는 ‘나’라 호명하며, 이를 깊고 진득하게 파고들어 사유하면서 자신의 일그러진 내면을 드러낸다. 그렇다. 박진화는 변조된 인간 형상과 특정한 사물의 병치를 통해 필연적인 존재 의미를 감성의 에너지로 치환하여 세계와 존재의 관계를 찾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양하게 변조된 인간 형상과 사물들은 오히려 감정적 억압인 자아의 정체를 배출시키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일그러진 내면과 형상이 등가물이라 하여, 그 이미지가 곧 자아의 분신이거나 아바타라는 의미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 ‘또 다른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와 그리는 대상이 관계 맺는 과정에서 보듯 그의 이야기는 작가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와 그곳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관한 것이다. 또한 조형적 질서와 내면적 성정의 분출이 화면에서 어떻게 상응하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박진화는 이미지가 추구하는 진정성의 영역을 확장해서, 회화의 근원과 동시에 자기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의 진술적 발화(constative utterance)에 따르자면 『지금의 나로 정의된 모든 것들을 지워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었다. “나는 나로 살고 있는가?”, “유일한 나는 무엇일까?” “내가 나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듯 내 그림의 방향과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찾기 위한 질문들 속에서 ‘자아’의 재 정의가 필요했다. 개념 이전의 것, 생각 이전의 생각, 자아 이전의 자아로 되돌아 가기 위해 본질에 접근하려 노력하였다.’』 이런 소회를 고려한다면 작가가 화면 위에 펼친 형상들은 분신이라기보다는 페르소나(persona)와 자아(self)가 공존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맞겠다. 하여 화면 속 인물은 종종 야누스적 형상이거나 이형동체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박진화의 ‘자아’가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에 있겠다. 흔히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변별 된다. 나의 행동을 통한 현존과 현존을 통해 달라진 나의 존재가 그것이다. 존재의 구성 요소는 과거에서 있었던 사건을 근거로 구축되며, 그 과정 중에 ‘나’는 ‘나’라는 ‘자성(selfness)’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타성(for otherness)’이 연동하고 그 결과물은 지속적으로 어딘가에 감춰져 있게 된다. 통상의 경우 그것은 의식의 저편에 잠복되어 있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작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화면은 작가가 형상의 왜곡과 사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 저편에 감춰진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박진화 작품에 자주 출현하는 인간군상과 대상들은 많은 단서를 제공한다. 예컨대 자아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동거하는 인간 형상-소외의 아이콘인듯한 고고한 인물, 퍼즐을 통해 자신을 세계에 끼워 맞추는듯한 인물, 이형동체의 인물-과 자연을 구성하는 해와 달, 나무 그리고 세상의 소소한 대상들- 집 건물, 비행기, 물고기, 새들 등등-과 독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듯한 문자와 기호들 모두는 자아 찾기의 조형적 오브제들이다. 이런 오브제들로 메워진 화면은 ‘진정한 내가 없음’의 공허를 드라마화하는데 봉사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의 최고의 심리적 방법론은 단적으로 말해 바로 ‘병치’이다. 논리적 연쇄 없이 여러 상이한 의미 망을 지닌 사물들과 텍스트들을 시공에 관계 없이 펼쳐 놓는 방식을 일컫는다. 박진화의 화면이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치는 인간 형상과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은 그것들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과 상황들’에 대한 내러티브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듯하다.

일례로 마치 초현실 세계에 있는듯한 작품 <그녀 이야기(her story)>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나’는 독해할 수 없는 텍스트의 바다를 홀로 배를 저어 나아가면서 느닷없이 새와 물고기를 만난다. 의외로 그 새는 화면의 그녀와 늘 동행하게 되지만 그 덕분에 날지 못하며, 반면에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날고 싶은, 세계의 순리와 이치라는 억압된 규범에서 벗어나고픈 작가의 서술적이자 상징적 장치로 여겨진다. 심리적 리듬으로 재편집된 것이다. 다시 말해 리메이크된 오브제들이다. 그렇게 ‘나’ 아닌 것들이 우연을 가장하여 만나는 방식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며, 그래서 신선하기도 하다. 그림 속 ‘나’는 또 다시 <자아(ego)>라는 명제에서 정신분석학적이면서도 표현주의적인 트랜드와 이유 없이 조우해 덧대어지고 그런 연쇄는 계속된다. 이유 없이? 아니 어쩌면 너무 명확하기에 그 이유가 덧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박진화에게 ‘나’ 찾기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찾기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이 외치는 자유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욕구가 아니다. 그림 속 ‘나’는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세계에서 나를 신비화 시키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에게 부여된 세계의 미사여구 축제에 던져진 ‘나’는 무기력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의 색채는 너무 현란하여 결국에는 그 현란함에 취해 그림 속 ‘나’의 눈은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교차된다. 그림의 주조 색은 화려한 붉은 색이지만 어디인지 모르게 음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작품의 내러티브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이 이미지는 작품 자체의 서술 구조의 치밀함을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어찌 할 수 없는 듯 노골적 ‘나’ 찾기는 계속된다. 명제에서 보듯 <나를 찾아서…> 시리즈는 일종의 퍼즐 게임이다. 대타성에 의해 형성된, 혹은 페르소나를 통해 구현된 다양한 ‘나’는 실상 편견과 오류가 혼합된 공산품 내지는 규격품이다. 규격품이라 칭하지만 그 품질은 난맥상을 이룬다. 너무 난맥을 이뤄 때론 몰골이 흉물이 되기도 한다. 하여 완벽하게 조합한들 허무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방식으로 이미 어떤 프레임에 의해 정해진 ‘나’는 조각 맞추기를 통하여 존재를 보장받는다. 더 나아가 ‘나’ 찾기는 테트리스 퍼즐 게임에 다다른다. ‘배우긴 쉽지만 마스터하는 건 어렵다(easy to learn, hard to master)’는 이 게임은 단순한 사각의 변형들을 짜맞추면서 일정 시간 안에, 일정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나’란 존재는 결말을 맞는다. 이 게임의 그림은 ‘존재’를 넘어 ‘실존’을 향해 치닫는 ‘나’ 찾기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객관적 지표가 가리키는 ‘나’ 찾기의 상직적 결말이기도 하다. 종국에 이런 방식의 ‘나’ 찾기는 중독에 이른다는 것은 기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갇혀진 나>와 <나였던 나>는 하나의 변곡점을 이루는 작품들이다. 명제에서 ‘갇힌’이 아닌 ‘갇혀진’이라 기술한 것은 피동적인 ‘나’를 상정하면서 ‘나’를 규정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타자(by)임을 곱씹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이중 피동을 통해 스스로 가두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회귀논리 어법이다. 또한 ‘나였던 나’의 토톨로지(동어반복, tautology)는 기호 논리학적으로 항진명제(恒眞命題)이다. 즉 어떤 명제의 참, 거짓의 어떤 조합에 대해서도 항상 참이 되는 진리함수(眞理函數)를 의미하는데, 그 어느 순간/상황/공간에서도 혹은 어떤 저항에도 ‘나는 나’ 이었음을 토로하는 몸부림이다. 억압과 해방 역시 자신의 몫임을 드러낸다. 변곡점이라 이름하는 것은 감정의 기복이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현대미술의 주요 전략기제이기도 하다. 이 작품들은 그런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변곡점을 지난 박진화는 <두 개의 나> 시리즈를 통해 페르소나와 자아가 공존하는 형상을 창안한다. 얼핏 보자면 이 시리즈는 입체파의 한 유형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상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입체파의 방법론과는 그 괘를 달리하고 있다. ‘두 개의 나’는 여러 시점을 가진 입체파의 그것이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인 인물상이며 물리적 형상이 아니라 심리적 형상이다. 고로 박진화의 그림에서 ‘나’는 물질적이 아니라 비물질적이다. 입체파가 복수 시점을 가짐으로써 회화의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면서 비물질화했듯이 박진화는 심리적 거리를 가진 두 개의 나를 일체화함으로써 비물질화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두 개의 형상이 결합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모노드라마이다. 다만 야누스의 이중적인 속성을 가진 인물상은 ‘나’ 찾기의 어려움을 은유적으로 환기시킨다는데 있다. 이렇듯 자아는 자아를 초월하는 주제이다. 자아 찾기의 딜레마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정의할 때조차 ‘진정한(?) 자아’가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야누스(Janus, 시작의 신)는 테르미누스(Terminus, 끝맺음의 신)를 만나지 못하리라. 하지만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부터 모노드라마는 끝나고 상대역을 맞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리즈 역시 여타 작품의 결론과 동일하다. 화려한 색 띠로 외곽을 치장한 세계에서 회색 빛 배경을 뒤로 한 꽃을 든 남성성과 머리에 날지 못하는 새를 이고 사는 여성성 사이에 감성적 갈등은 상식에 속한다. 무표정과 담담함을 가장한 채 발 밑에는 여운의 그림자인지 카이로스(kairos)의 날개인지 모르는 표상이 나타나고 있다. 카이로스 발의 날개는 빨리 사라지기 위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것은 하나의 ‘분리’를 표상한다. 그 분리의 뉘앙스는 이 시리즈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예컨대 세계와의 외연의 줄긋기에 덩달아 너울너울 춤추고, 결합된 남녀의 초생 달밤은 스산한 푸른 빛이며, 의자를 닮은 두 남녀는 싸늘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고, 소통의 대화는 독해할 수 없는 기호가 되어 그들을 관계를 와해시키는 양상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또 다른 패러독스(paradox)가 있다. 결합이 분리를 더욱 조장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작품 <휴식>은 안락의자를 미끼로 붉은 심연에 빠진 하얗고 차가운 이성의 머리에 장미를 꽂아 둔 채 녹색 ‘자아’의 감성은 유체이탈을 꿈꾼다. 분리가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이다.

분리된 ‘나’는 또 다시 결합을 꿈꾼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찾기’는 ‘반추’로 이어진다. ‘반추’ 역시 ‘찾기’의 연속성에 있음은 쉽게 간파된다. 는 표면상으로 가족드라마로 보이지만, 실상은 마치 익명을 표방하듯 이목구비 없는 무표정에다 껴안기에는 너무 얇거나 자신이 배제된 그 누구를 위한 의자의 형상이다. 소외는 계속된다. 어떤 상황이든 반추하면 반추할수록 본질은 희석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마도 그 가족 드라마의 중심에는 박진화의 ‘현존’ 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런 ‘현존’을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 이유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라는 실체는 변함이 없지만 의미 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화면 전체에 부유하듯 떠다니는 가는 타원을 통해 그 의미 구조를 염탐(그 형태가 눈 모양과 유사하여)할 수 있겠다. 그것은 작가의 표현대로 ‘상처’이자 ‘그리움, 희망, 공허, 본질’ 그리고 ‘다시 물질로 돌아가는 인간의 분자’로 그 의미가 복잡다단하다. 이렇듯 현존은 유동적이며 ‘그 무엇’일 뿐이다.

박진화는 일종의 회상이자 심리적 지층을 보여주는 사물과 기호들을 강박 반복은 아니더라도 여러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배치한다. 그에게 몇 개의 대상은 자아 찾기의 중요한 메타포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그것들은 상대적/동질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해와 초생 달, 꽃과 새, 줄기식물, 외곽을 두르고 있는 색 띠, 긍정의 기호 플러스, 타원형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이질적인 심리의 결합, 감성의 이중성, 결합과 분리, 억압과 욕망, 화려함과 처연함을 환유적으로 제시한다. 단순한 형태에 비해 이토록 다양한 요소들이 작동하기 때문에 실제로 표현된 결과는 중층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역설과 아이러니는 그의 그림 전반에 스며들어 있으며, 의외로 기묘한 생기를 낳고 있다. 측정할 수 없는 시공과 화면 여기 저기에 채집해 넣은 줄기식물, 아래 위로 구획된 화면, 중첩된 가는 선묘 등으로 해서 그림은 일체감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마티에르가 있다. 화면 전제를 아우르는 미세하지만 균일한 마티에르가 없었다면 그 장면들은 기제 과잉이 되어 심리적 강도가 덜했을 것이다. 이 마티에르는 그 장면들에 점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티에르는 일종의 접착제이다. 심리적 균일 감을 주거나 집중력을 불러일으키려 할 때 마티에르의 힘에 기대게 되는 수가 많다. 나아가 작가는 종종 전통적인 질료가 아닌 점토를 화면에 사용함으로써 암담한 현실에 심리적 온기를 부여하고자 시도한다.

박진화의 작품은 일종의 드라마이다. 각각의 작품은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한 시퀀스(sequence)로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필자가 분석하는 순서대로 그 시퀀스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불가역적인 시간의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가 관습적인 ‘자아’라는 교묘하게 직조된 구조를 역설적 화법으로 보여주고, ‘자아’라고 호명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그친 수많은 연상들이 끝없이 상호 침투하는 것을 단순하고 일상적인 대상들의 병치 하에서 관객에게 비판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의 시간은 가역적이다. 아코디언처럼 쭉 펼쳐졌다가 한껏 움츠러드는 이 세계에서 박진화는 타자의 ‘나’이자, 자아의 ‘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은 압축되고 역전되어 관념체계를 무너뜨린다. 나아가 그가 각각의 사건을 가역의 시간 속에 펼쳐 보이며 그 심리적 요소들을 이미지로 구체화한다는 사실은 그가 자아가 아닌 자아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을 뿐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자. 그렇다, 회화의 운명은 환영이고자 할 때 진실이고, 진실이고자 할 때 환영이다. 다만 그는 그림자를 배열할 때 그 그림자를 투사하고 있는 대상이나 상황이 불합리하고 특수화시킨 것은 아닌지 관객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도록 그것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자면 그의 일상은 연속해 흘러가는 객관적, 정량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 시간이며, 작품 속에서의 그는 가역적이거나 주관적, 정성적 시간인 ‘카이로스(kairos) 시간’이다. 그 만큼 그림 속에서 ‘나’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박진화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자아’는 그림 속에만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가 그의 자리이다. 살펴보면 작가의 추상적인 내면과 세계의 구체적인 외연을 통합시켜주는 곳이 바로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박진화는 자기 자신 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성찰하고 명징하게 드러내는 자질을 갖춘 작가로 여겨진다. 현실과 환영의 세계에서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persona)와 자아(self)’의 내적 통일성을 찾고자 이미지에 정신과 감정을 섬세하게 부여한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주체와 객체, 시간과 공간,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심미적인 힘이 있다. 그의 그림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방법론을 매개로 스스로 분석하고 자아 찾기를 통해 예술을 성찰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결과물이며, 그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여 소통과 교감을 시도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제 여기서 라틴어 경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떠오른다. 흔히 ‘오늘을 즐겨라’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송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경구를 빗대 ‘지금 여기-그림에 현존하라.’


유 근 오 ( 미 술 평 론)